조기섭 개인전
채워진 텅 빈 공간
글 | 권 주 희 (스튜디오126 대표)

한국화를 매개로 형상 너머의 형상을 탐구해 온 조기섭 작가는 시간의 축을 따라 축적된 의미를 들추어내고 유형과 무형, 형상과 본질 사이를 탐구한다.
《채워진 텅 빈 공간》은 형상으로 가득한 화면을 다시 갈아내어 비우는 작가의 작업 방식, 그 과정과 결과를 통해 더 넓고 광대한 세상을 마주하며 깨달음을 얻는 시간을 뜻하기도 한다. 즉, 작가는 작업을 대함에 있어 무엇을‘잘 그리거나‘해내야 한다’라기 보다는 욕심을 비워내고 대상과의 관계를 통해 그 안에 깃든 원형과 본질을 들여다본다.
본질은 근본적인 것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며, 일반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어떤 것이다. 시각예술을 다루는 작가는 손의 수고로움, 즉 쌓고 다시금 비우는 행위의 반복으로 자연을 표현하고 본질을 찾아 나간다. 존재와 부재가 거듭되어 형성된 공간, 그리고 그 공간 사이 드러난 여백을 통해 비로소 내가 자연에 속한 존재이며 한없이 작은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자연을 닮은 인공물, 자신의 심상으로 바라본 자연의 이미지를 화면에 제시하고 있지만 그 너머를 사유하게 하고 진리를 마주하도록 이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한국화를 기반으로 재료의 확장을 시도하고 회화와 설치의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세계관을 구체화한다.

조기섭 작가론
빛의 기둥, 더 넓고 깊은 세계
글 | 김 노 암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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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구도심, 사방이 낮은 집과 골목길로 이루어진 장소에 <스튜디오 126>이 있다. <스튜디오126>이라 명명된 집은 오래전 사람들이 떠나고 남겨진 폐허, 폐가에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된 장소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장소가 아니라 의미와 형식, 사건이 아주 잠시 머물거나 경유하고 지나가는 곳이다. 이번 전시는 이전에 작업들과 비교해 볼 때 확연히 전시 장소의 장소성에 특별한 성격을 부여하려는 작가의 의도가 명확하게 투영되어 있다.
오랫동안 나무와 숲, 바다와 해안, 바람과 돌이 작가의 작품이 다뤄온 세계이다. 지구와 대자연을 그림으로 표현해온 작가는 어느 순간 그림과 그림의 밖의 현실을 연결하고 있다. 또한 보다 개념적인 사유와 설치로 확장해 왔다. 이번 그의 개인전 <채워진 텅 빈 공간>을 채운 작업들은 수평과 수직, 회전하고 반복하고 솟고 가라앉는 시각과 사유의 다양한 운동과 방향, 세기가 복합적으로 혼융되어 있다. 작가가 견지해온 문제의식과 창작과정에 깊이를 더해온 사유의 연장이다. 작가의 이번 작업은 회화보다는 설치에 가깝다. 또한 장지에 은분으로 제작한 이미지는 단순한 평면 이미지가 아니라 마치 홀로그램을 통해 다양한 차원의 현실들을 경험하게 하려는 듯 중층적인 이미지의 레이어를 보여준다.
“나는 자연은 선택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순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대상으로 여긴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변하지 않는 시간을 느끼고 자연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기둥, 2022)”, “본질은 그런 것이다. 근원적 본질은 존재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진다. 본질은 정지해 있는 상태가 아니다. 바위와 떨어져 나간 돌, 본체는 무엇일까? 생의 순환의 시작은 어느 것에서 시작하는가?(위대한 유산, 2022)”, “순환의 연결고리, 즉 본질은 그 자연의 일부가 되기 전까지 알 수 없다.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은 자연의 섭리를 알았을 때 비로소 공(空)으로 돌아가 ‘채워진 텅 빈 공간’이 된다.(백일몽_하늘, 2022)”
이번 전시의 작업 노트를 보면 조기섭 작가가 감각적이고 재현적인 세계가 아니라 그 너머의 보다 형이상학적 사유에 작업의 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연과 본질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작가는 시간과 공간 그리고 기억을 오랫동안 사색하고 자기 방식으로 감각과 개념의 결합을 통해 표현해왔다. 전시와 물질적 또는 형태의 표현이란 물질성과 비물질성이 독특한 감각과 형식으로 어우러진다. 작가의 설치를 경험하며 관객은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작가가 고민했던 지점에 접촉하게 된다. 설치 환경에 관객은 들어감으로써 작품의 부분 요소가 되고 작품이 일정한 형태를 갖추게 된다. 이상적 관객과 완전하게 완결되어버리는 설치미술의 경험은 매력적이다. 그러나 감각적 인상과 경험을 가로지르며 작가의 작업은 공간과 시간, 존재와 기억과 본질의 사유를 통해 상징의 문제와 연결되며, 일상 세계의 경험과 이해의 영역으로부터 멀리 확장하고 이탈한다.
오래된 집과 오래된 기억이 만난다. 시간의 중력이 중첩된 장소는 우리가 바라보는 것 이상으로 장소가 우리를 바라본다. 동시에 작가의 작품이 창작자와 관객을 바라본다. 시선과 시선이 만난다. 시선은 모든 곳에 편재해 있다. 집은 기억하고 있다. 집은 하나의 세계이다. 낡은 세계일지언정 하나의 완전한 법칙과 문화를 품고 있다. 조기섭 작가는 빛의 길을 따라서 오래된 세계와 기억에 한 걸음 다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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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의 또는 지중해의 신전들의 기둥을 옮겨 놓은 은빛의 기둥이 집안에 세워져 있다. 이 은빛 기둥은 물리적으로 이 낡은 집을 지탱하는 기둥은 아니다. 삶을 지탱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세계의 지붕을 지고 있는 거인과 그의 등에 짐 지운 기둥은 어디에 있는가. 작가가 세운 기둥은 물리적 경험의 공간에 세워진 것이 아니라 작가의 마음 속에 세운 것을 은유한다. 작가는 아주 오래된 주택을 현대미술을 실험하는 전시장으로 연출한 <스튜디오126> 속으로 들어간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관객은 작가가 걸어 들어간 세계로 들어간다. 지붕을 받치는 낡은 기둥들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높이 솟은 은빛 여인(여신)이 새겨진 기둥이 있다. 은빛 기둥을 중심으로 1층과 2층의 공간에 은빛의 평면 이미지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 이미지들의 위와 아래, 좌우로 그 이미지를 반영하는 거울이 있다. 전시장 2층에는 빙하가 녹으며 드러난 돌들이 좌우로 대칭하고 있다. 작은 옛집의 분할된 공간과 동선을 따라서, 본래의 기둥과 벽면과 조응하며 조기섭 작가의 은빛의 이미지가 원상과 원상을 반영한 모상이 공존하며 새겨지고 장치된다.
태고의 여신 ‘마고 할미(설문대할망)’의 나라 제주는 세계를 여신이 지탱하고 있다. 신화에 따르면 마고 할미는 산과 바위, 강과 하천을 만들고 세계의 창조에 관여한다. 우주의 질서를 지탱하는 것은 신들이고 여신들이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우주를 연결하고 안전한 질서와 규칙을 만들고 매개한다. 세계와 우리 존재의 기원을 다룬 신화를 만나면 인간은 작아진다. 복잡하고 숭고한, 감동적이지만 동시에 불가사의하고 아이러니한 이야기들의 씨줄과 날줄로 짜여진 거대한 신화는 우리의 상상력을 고무시킨다. 이름을 지어주고 불러주고 계속해서 상상하고 생각함으로써 세계는 생동하고 안전해진다. 세계의 지속이란 곧 이름을 지어주고(창조), 기억하고 부르는(노동) 활동을 통해 가능해진다. 신들의 이야기(신화)가 망각되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진다면 미하엘엔데의 환상소설 <끝없는 이야기>의 세계처럼 우리의 정신 세계도, 우리의 정신과 물질의 균형도 완전히 무너지고 소멸해버릴 것이다.
“이 하늘의 저쪽, 모든 것의 저쪽, 그 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최고의 천상계에서 빛나는 빛은 바로 인간 안에서 빛나는 빛과 동일하다. (찬도갸 우파니샤드)”
인류 문화 속 신화와 종교에서 ‘빛’은 세속적 세계에서 영적이며 신성한 영역으로 나아가는 길을 상징해왔다. 조형적 점으로 환원하는 원근법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인 점(코나투스) 또는 내적인 빛, 신성의 표징으로 우주의 빛, 신의 눈동자를 은유하는신성한 기하학 등을 은유한다. 빛은 형이상학적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비현실적이며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을 예감하거나 상기시킨다. 은분은 색으로 인식되지만 그보다는 하나의 빛을 은유한다. 달빛. 신화 속 해와 달 남매의 이야기에서 바로 달의 자녀들은 은빛으로 신비한 존재성을 드러낸다. 오래도록 은은 빛으로써 인간의 마음을 위협하는 다양한 위협들로부터 지켜주는 벽사의 의미가 부여돼왔다. 근대 화학이 발달하기 전까지도 액체 은인 수은은 우주적 비밀로 가득한 연금술 시대의 여왕이었다. 은은 현대보다 과거 신화시대의 빛이고 색이다. 그러니까 은은 연금술과 신화의 영역에 속한다. 마법과 신비가 일상이었던 시대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은색을 사용한다는 것은 빛을 다루는 것이고 신화를 다루는 것이다. 조기섭 작가는 아주 낡은 주택 한가운데 은빛의 기둥을 세운다. 오래전 뤽 베송의 영화 <제 5원소>를 떠올린다. 영화의 마지만 씬은 여주인공의 가슴에서 우주를 향해 뿜어져나오는 빛기둥이다. 지구 인류를 구원하는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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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가 궁금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삶의 의미를 찾을 정도로 자신이 진지하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의 삶의 무게를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삶을 구성하는 장소와 시간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 사람도 결코 없다. 우리는 의식하던 그렇지 않던 다양한 방식으로 나의 삶의 의미를 간절히 모색한다. 원형적 결핍과 욕망은 원형적 질문을 던지고 유령처럼 반복해서 출몰한다. 문득 삶의 의미가 사유의 중심에 솟아버리면 평범한 일상은 낯선 세계가 된다. 일상은 궁극적인 질문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달라진다.
인간의 역사는 당대 인간이 당면한 문제 해결의 역사이지만, 동시에 인간이 짐승의 단계에서 갑자기 벗어나 스스로 인간이라 부르는 반자연적인 상태로 변신했을 때부터 인간 스스로 ‘문제’가 된 역사이기도 하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스스로 ‘문제’가됨으로써 역사란 문제가 굴러가는 모양으로, 결코 문제 해결의 역사가 아닌 문제 발생과 문제 진화의 역사라고 볼 수 있다. 문제의 심화와 복잡화인 것이다. 눈앞의 문제를 다른 문제를 만들어 덮어버리거나 기만하는 교묘한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바로 이 ‘인간’이라는 상식적 규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운동도 볼 수 있다. 문명과 문화에 대한 다양한 방식과 차원의 저항과 대안의 제시인데, 인간과 자연의 이분법적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존재 방식의 모델을 모색한다. 그것은 시적 상상력일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른 종류의 몽상과 비전에 의해 제시되기도 한다. 아마도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무수한 익명의 예술가들의 감정과 사유와 창작의 노동이 오랜 시간 쌓이며 하나의 숙명처럼 또는 영적 중력으로 쌓여서 거대한 지각변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믿음일지도 모른다. 용도를 다한 낡은 장소에서 작가는 새로운 신화와 전설의 텍스트를 만들어간다. 문제의 해답을 답이 마치 분명하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이미 있다는 식의 문답이 아닌, 또는 다른 문제로 은근슬쩍 눙치지 않는 방식으로, 화산과 바다, 바람과 돌과 나무가 만들어낸 놀라운 섬 위에서 인간이 만들어온 신화적 사유로 지은 건물을 짓고 있다. 조기섭 작가의 근래의 작업들은 이런 움직임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신화의 빛으로 일상을 비추고 있다. 초시간과 초공간. 진공이 아닌 우주 전체, 모든 것이 끈끈하게 가득 찬 세계에서 작가는 생각한다. 과거와 현재, 신화와 역사, 문명과 자연, 해양과 대륙이 만나는 제주에서 작가는 새로운 유형의 작업과 전시를 통해 작가의 태도를 가늠하고 있다. 시원을 확인할 수 없는 인류사의 거대한 시간의 흐름을 역류하며 나아가기도 하다. 은빛의 이미지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깊은 사유의 바닥에 빠져든다. 몰락하고 있는 현생 인류의 문명을 목격하면서 현대미술은 신화와 과학, 영성과 철학이 상호간섭하며 새로운 차원을 개시하려고 한다. 작가에게서 미술은 단지 조형적 실험의 세계에서 벗어나 더 멀고 깊은 세계로 나아간다. 현대 미술은 어디까지 왔는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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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가지 나무 장지에 은분 180×280cm 2022
삼촌이 말해준 천 가지 나무. 하나의 뿌리에서 천 가지의 과실이 열리는 나무가 고향에 있다. 실재 (實在)하지 않지만 가능할 것 같은 믿음은 신앙을 만든다. 접 붙이기를 통해 여러 과실을 얻는 감귤나무처럼 시간을 들여 3~4개의 과실을 얻을 수 있다. 이 사실은 천가지 나무의 존재가 가능할 수 있다는 믿음을 만든다. 나는 이런 믿음이 대상에 투영될 때 일어나는 현상이 신목의 존재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신목에는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다. 살아남은 나무는 믿음을 낳고 믿음은 존재 가치를 만든다. 무언가 깃들여 공을 들이는 대상,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인위적인 노력과 시간은 신기하게도 자연을 그대로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다시 시간성을 획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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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들리에 장지에 은분, 과슈 120×180cm 2022
세대를 거쳐 가치를 증명한 조각상이 공간을 지배한다. 인공의 공간을 보며 원형의 동시성에 대한 고민을 했다. 공간을 보고 존재의 의미를 찾는다. 공간을 압도하는 초대형 샹들리에를 보며 생각했다.‘저 인공물은 공간을 위한 것일까, 샹들리에를 위해 공간이 만들어진 것일까.’나는 샹들리에를 위해 공간이 만들어졌다고 본다. 공간이 대상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것. 이미 존재하지 않았던 대상을 위해 존재를 만들어내고 유지하는 것. 자연 발생적이지 않은 것을 위해 사람들은 시간을 들이고 그 인공물을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나는 시각적으로 보이는 배열과 시간의 동일시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대상을 그리며 존재를 비워낸다. 경외의 인공물을 그림으로 다시 기록하면서 보존해야 한다고 믿는 유형의 유산이 내포하고 있는 무형의 가치와 원형에 대한 서사를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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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 장지에 은분 544×40cm 2022
사용자인 사람이 자연이 되고자 하는 마음. 그것은 ‘신의 영역(자연의 섭리)을 침범한 사람’이 만든 신전을 불가침의 영역이라고 규정하고 그 믿음을 증명하고자 세운 그리스 신전의 돌기둥과 같다. 건축의 기원을 수목에서 설명하는 수목 기원설이 있듯이 특별한 인공물은 곧 인간이 침범할 수 없는 영역으로 신성시되었다. 작품을 설치한 스튜디오126은 1940년대 한옥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한옥 건축에서 하나의 의식으로 여겨지는 상량식은 자연을 채집해 인공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그들의 염원을 담는 행위가 되었다. 자연을 다루는데 인위로 막을 수 없는 불의 영역에서, 안위를 갖고자 쓰는‘용’자와‘귀’자는 조왕신에게 의지하고자 행해지는 의식이다. 자연을 다루는 자가 느끼는 자연의 기운은 두려움일지 모른다. 섭리를 거스르는 인위를 통해 무사함을 감사하고 안녕을 비는 의식은 사용자의 나약함을 보여준다. 이 지점에서 나는 자연은 선택하여 보는 것이 아니라 순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야하는 대상으로 여긴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변하지 않는 시간을 느끼고 자연이 되어 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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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장지에 은분, 과슈 60x60cm 2022
사생과 관찰에 대해 고민한 작품이다. 대상을 그린다는 것은 대상과 나의 관계를 파악하고 그 본질을 찾아 그리는 행위다. 돌의 본질은 무엇일까? 이 돌을 표현하기 위한 이상적인 시점은 어느 곳인가. 이런 사고 속으로 들어가 대상을 관찰할 때 돌이 가지고 있는 물질성은 사라지고 허공에서 유영한다. 돌을 사방에서 관찰하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는 대상과의 관계성을 표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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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유산 장지에 은분 140x200cm 2022
돌이 본질(本質)에서 떨어져 나가듯 빙하가 부서진다. 이내 떨어져 나간 객체들이 다시 생을 시작한다. 자연의 변화는 진행되고 있지만 경과는 이전과 지금 모습의 비교를 통해서 알아챌 뿐 한 번의 생을 통해서 확인하긴 힘들다. 셀 수 없는 반복은 공통된 모습을 그러낸다. 본질은 그런 것이다. 근원적 본질은 존재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되는 모습으로 우리들에게 보여진다. 본질은 정지해 있는 상태가 아니다. 바위와 떨어져 나간 돌, 본체는 무엇일까? 생의 순환의 시작은 어느 것에서 시작하는가? 시작의 근원을 질문할 때 비로소 자연의 호흡에 들어가 숨쉰다. 마침내 실제하는 대상은 객체가 아닌, 주체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 같은 것이 변하고 있다. 아니 움직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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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걷는풍경 장지에 은분, 분채 120x270cm 2022
부감의 시선 속 하얀 파동이 있다. 파동은 화면이 물이라는 것을 상징하고 있으며 나에게 물을 그리는 과정은 정신의 움직임이 각인된 추상화라고 생각한다. 샌딩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종이가 가지고 있던 결의 움직임은 종이가 가지고 있던 깊이를 드러낸다. 표면을 보지만 그 평평한 깊이를 따라 무의식이 흐른다. 무의식은 기억하지 못하는 경험한 것들을 기술한다. 그 사이 떠 있는 돌은 충돌의 상으로 무의식에서 기억해 낼 수 있는 가까운 의식을 만들어낸다.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무의식의 조건들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상응하는 형상을 만들어 내는데 종이가 가지고 있는 원형의 표상을 활용한다. 그림을 분석하려는 개인의 의식과 합성될 때 다시 무의식을 포용하게 된다. 눈뜬 명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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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몽-하늘 장지에 은분 140x231cm 2022
공존은 평균을 향한 ‘자리 지키기’를 하기 위해 전투한다. 치열한 사건의 순간도 멀리서 바라보면 고요하다. 어느 한 대상이 우위를 점하거나 자존을 잃은 대상이 모여 있을 때 공존은 사라진다. 생의 순환에서 들어가 만나는 대상들은 자연의 순환 법칙 위에 있지 않다. 결국, 각자의 영역을 인정하고 섭리를 받아들일 때 공존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순환의 연결고리, 즉 본질은 그 자연의 일부가 되기 전까지 알 수 없다. 눈 앞에 펼쳐진 공간은 자연의 섭리를 알았을 때 비로소 공(空)으로 돌아가 ‘채워진 텅빈 공간’이 된다. 자연을 그리는 것은 사람을 그리는 것, 사람은 생각의 배경 속으로 묻힌다.
자연을 그린다는 건, 사람이 자연을 대하는 마음을 그리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