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 ki seob

#4 제주, 그리고 기억하다

 

 

제주에서는 모든 것이 가까이 있다. 산과 숲, 바다와 하늘, 초목과 꽃, 사람과 동물들. 어디서든 한라산이 보이고 길을 달리면 오름들이 가까워졌다 멀어져 간다. 바다는 바로 눈앞에 그리고 아득히 저 아래로 펼쳐져 있다. 벌써부터 시원하게 그늘을 드리운 진녹색의 나뭇잎들은 아직 찾아오지 않은 더위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해 준다.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 상록수들은 추위에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아직은 이른 봄이었고, 아직은 이른 여름이었다. 해변은 텅 비어 있었다. 주차장도, 실외목욕탕도, 놀이기구도, 방파제와 등대 주변도. 그러나 바람은 그 빈자리를 채우려는 듯 강하게 불어왔고 백사장에는 사람과 동물, 새들의 발자국들이 어지러이 남아 있었다. 파도가 밀려왔다 빠져나가며 남긴 흔적이 길고 복잡하게 뻗은 나뭇가지 형태 같아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 옆에 죽은 바다메기가 쓸쓸하게 잠들어 있었다.

 

어린 시절 우리는 위험하니까 아이들끼리는 가지 말라는 어른들의 금지에도 바다를 쏘다녔다. 스티로폼을 던지고 헤엄을 배우다 나는 바다에 빠져 죽을 뻔했고 지금도 헤엄을 치지 못한다. 보말을 잡겠다고 몰려가면 흐린 바닷가의 현무암을 차지하고 있던 갯강구들이 순식간에 숨어 버리곤 했다. 해변 여기저기에, 자그만 동굴 속에 숨어 있던 용천수는 해안선의 깔끔한 정리와 더불어 깨끗하게 없어져 버렸다.

함께 뛰놀던 친구들은 벌써 한참 전에 연이 끊겼고 유년 시절도 그렇게 사라졌다. 나는 오랫동안 삶이란, 삶의 섭리란 그러한 것이라고 믿으며 지내왔다. 춥고 서글픈 계절이 지나면 슬픔과 절망을 녹이는 봄이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 봄은 기대만큼 행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삶에 짓눌려버릴 뻔했었던 일을 생각하는 것은 찬란한 봄에도 끔찍할 게다.

그러나 봄의 우울조차 결국은 세월의 무상함에 이기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나는 여기 멈춰 서서 가능하면 오래도록 이 덧없는 봄을 붙들고 있겠다.

 

 

 

01 바람을 휘감은 나무

-조기섭(미루나무꼭대기창작소 원장, 한국화가)

 

 

나는 미술관과 박물관을 어슬렁거리는 걸 좋아하지만 딱히 미술 애호가는 아니다. 게다가 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동시대의 작품에는 큰 관심이 없는데 그것은 내 취향이 상당히 구식이고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딜 가든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반드시 들르곤 한다. 유럽엔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멋진 박물관도 있었고 아시아엔 시설부터 작품 보존 상태까지 실망스러운 미술관도 있었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서 나폴레옹은 영웅이었지만 다음 날 런던의 대영박물관에서 마주친 그는 무도한 악당이었다. 가난하지만 관능적인 도시 베를린의 박물관섬에는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가득해 그 긴 줄을 기다려 표를 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문화와 역사가 얼마나 정치와 경제, 이념과 헤게모니가 첨예하게 맞붙는 영역인지 실감했다.

그렇긴 해도 고향에 돌아왔을 때 제주에서 예술 활동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궁금하진 않았다. 이 아름다운 변방에서 살아가며 문화의 현장에서 내가 누구인지, 그렇게 우리가 누군지 되묻는 이야기에 별 흥미가 없었다. 그보다 길을 나서면 매순간 시선이 닿는 사라져 버린 친숙한 풍경들, 좀 더 자랑하기 위해 훼손되어 가는 자연이 안타까워서 관광 인프라를 결정짓는 정치와 경제에 대해 막연히 생각했을 따름이다.

 

작년 여름, 그의 첫 개인전 “황금이 되고 싶은 말”을 우연히 보러 갔을 때 몇몇 그림들이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딱히 그의 작품에 감탄하거나 공감했던 건 아니었다. 그곳에 있는 제주는 내가 아는 제주와 상당히 달랐다. 한참 뒤에야 그가 다루는 소재들, 말이나 바다, 등대, 돌 이런 게 쟁점이 되고 있는 제주의 현시대상이며 제주의 풍경을 모르는 것은 내 쪽이구나 깨달았을 뿐이다.

차분하게 표준어를 쓰고 단정한 옷차림 위에 가볍게 앞치마를 두룬 이 청년은(사실 그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 화려한 색깔을 좋아한다) 서른두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인생의 절정에 이른 사람처럼 일 분도 낭비하지 않고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고작 화요일 하루를 쉬지만 그날조차 다른 업무로 바쁘다) 미술관과 박물관, 여러 기관과 단체에서 아동미술 프로젝트를 맡아 진행한다. 가끔은 추자도 같은 문화 소외 지역에 직접 찾아가 수업하기도 한다. 그 사이사이 회의를 하고 프레젠테이션을 하고 새로운 기획을 준비하느라 끼니를 거르기 일쑤이다.

 

“창작소 밖의 모임에서 저는 항상 막내입니다. 다들 저보다 상당히 나이가 있는 분들이죠.”

거기다 현재는 휴학한 상태이기는 하나 제주대학교에서 미술교육학 석사 과정을 밟고 있다(다음 학기에 복학할 계획이라고 한다). 학부 시절 기회가 있었지만 교육학 과정을 이수하지 않았다. 입시 미술을 가르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아이들을 가르치게 된 지금은 학부 수업까지 챙겨 들으며 대학원 강의를 들어야만 한다. 어떻게 이 많은 일을 다 하는지 신기하기만 한데, 창작 활동 역시 멈추지 않는다. 작업실로도 사용하는 원장실에는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그림이 놓여 있었다. 일중독이 아니냐고 대뜸 묻자 부정하지 않는다.

“서른다섯까지는 쉬지 않고 일하고 싶어요. 십 년은 해야 자리가 잡힐 테니까요.”

 

그가 원장을 맡고 있는 미루나무꼭대기창작소는 이름과 달리 높은 곳에 위치해 있지 않다. 먼저 말 그대로 제주 구시가지의 오래된 건물 3층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아이들은 아무것도 강요받지 않고 자신의 생각대로 차근차근 미술 작업을 해 나간다. 열정과 책임감을 가지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젊은 선생들은 그 낮은 눈에 시선을 맞추고 함께 미루나무 꼭대기에 걸린 흰 구름을 꿈꾸는 것만 같다.

창작소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생동감 넘치는 아이들의 작품과 마주치게 된다. 빨주노초파남보 색색의 물감으로 칠해진 그림들. 숨바꼭질하듯 얼굴을 내밀고 있는 새와 곤충, 동물 조형들. 오토바이는 날아가고 유리문 너머로 자신만만하게 펼쳐진 우주선 도면이 보인다. 문틀 위에는 하늘 한 조각이 걸려 있다. 이 사랑스러운 풍경에 미술 시간이 이렇게 즐거운 시간이었나 깜짝 놀라게 된다. 수업을 보지 않아도 그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웃고 떠들고 장난치며 집중하고 때론 실패하며 아이들은 지금 자라고 있다. 성실하고 올곧게 외길을 걷는 이 남자는 조만간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아동 미술 교육에 대해 의미 있고 중요한 이야기를 한가득 들려줄 수 있을 게다.

 

어렸을 때 그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아버지는 실력 있는 오토바이 기술자였다. 스즈키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기도 했다. 장남인 그는 아버지를 닮아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비싼 장난감을 분해하곤 다시 조립할 수 없어서 울고 있으면 척척박사인 아버지가 와서 도와주었다. 가게와 살림집이 붙은 건물이었다. 집 한편에서 아버지가 일을 하고 있으면 다른 한편에서 어머니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그가 누운 조그마한 방, 밥 냄새가 흘러 들어오는 그 조그만 창문으로 보이는 노을은 붉었다.

“그 시절에 저는 행복했어요. 보호받는 느낌이었죠.”

 

그의 손등에 있는 까만 점 두 개를 보고 그림을 그리다 묻은 먹물 자국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학생 때 막노동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생긴 상처였다. 날카로운 것에 찔려 피가 고였던 게 사라지지 않고 점으로 남은 것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는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타지 출신이라 제주어를 잘 못 알아들었던 어머니는 친구들과 놀면서 금세 사투리를 배워오는 그에게 집에서는 표준어를 쓰라고 요구했다. 덕분에 말투가 이상하다며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기도 했다.

 

고집불통이고 매일 술을 마시던 아버지가 병이 나면서 소박하고 행복한 풍경은 어느덧 사라졌다. 간이 나빴던 아버지의 몸에는 암이 자라고 있었지만 술로 인해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벗으로 평생을 희생해 온 어머니의 노력이 더해갈수록 아버지는 더욱더 무력해졌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고 방학이면 제주도로 돌아와서 공사장에서 일했다. 가난하던 학생 시절 그는 배가 고파서 저녁때면 전시회를 오픈하던 인사동의 갤러리를 돌아다녔다. 힘겨웠지만 즐거웠던 대학교를 졸업할 무렵 십 년을 아프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의 빈자리는 예상보다 컸다.

 

“든든하게 제 주변을 에워싸던 울타리가 없어졌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어요.”

아버지 대신 그가 집안의 중심으로 앞만 보며 전진한 지 벌써 여섯 해째이다. 서울 생활을 접고 제주도에 내려와서 아동 미술을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바로 돌아왔어야 했으나 아무런 준비 없이 가르칠 수는 없었다. 졸업하고 일 년,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전세금의 일부를 쓰면서 대구와 부산에 있었다. 어쩌면 결심과는 달리 선뜻 내려올 수가 없어서 자신에게 시간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친 지 삼 년이 되던 해에 제주도에 처음 학원을 열었다. 물론 그 다음의 과정도 쉽지는 않았다. 정말로 많은 일이 있었다. 학생이 아무도 없어서 벽만 보고 있을 때도 있었다. 처음 연 학원에서는 믿었던 사람에게 쓰라린 배신을 당했다. 많은 일들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지금도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나버린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 성치 못한 몸으로 하루도 쉬지 않고 새벽부터 고된 일을 하고 밤이면 술 한 잔으로 마음을 달랬는지. 외로운 타지 생활. 사람에 대한 믿음이 엄청난 빚으로 되돌아오는 배신감. 아버지를 의지하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얼마나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는지.

“아버지가 제게 어떤 존재였을까요? 좋아했는지 미워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아요. 하지만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던 지금의 제 모습은 예전의 그와 똑같아요.”

 

지칠 때면 지금도 훌쩍 고향인 세화로 와서 한두 시간이고 바다를 바라본다. 제주도를 떠나 있을 때는 사진을 엄청나게 찍어서 가지고 갔다. 파노라마 기능이 없던 시절. 사진을 하나하나 겹쳐 이어서 벽에 붙였다. 처음 집을 떠나 서울에서 혼자 지내던 시절, 그가 그리워하던 고향의 풍경은 언제나 밝고 따뜻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마치 유년 시절에 쏟아지던 노을처럼. 그런데 막상 돌아와서 그가 마주친 색채는 돌담의 검은색이었다.

 

그렇게 그의 작품은 마음속에 새겨진 기억의 풍경이기도 하고 또한 이 순간 그가 응시하고 있는 시간의 결에 쓸려 변해가는 제주도의 경치이기도 하다. 가는 붓으로 몇 번이고 겹쳐서 색을 입히기에 크기에 상관없이 그림에 들어가는 시간은 비슷하다. 마음을 다스리는 느낌으로 그리지만, 사람들의 눈길을 잡아채는 화려한 색을 담으려 한다. 그의 그림 속에서 죽은 나무는 빛나는 하늘을 배경으로 바람에 흔들리고 있어 마치 살아 있는 것 같다. 이 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이 고독한 나무는 거센 바람에 온 몸이 굽었으나 역경에 굴하지 않았다.

그에게 시간은 두 개로 나뉘어서 존재하는 듯싶다. 행복한 유년 시절과 제자리를 만드느라 숨을 가다듬을 여유조차 없는 지금. 아이들을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무게를 실감하게 되어서 무서워진다고 말하는 그는 아마 자신이 누리지 못했기에 창조하는 행위의 즐거움을 새로운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은 것일 게다. 또한 앞으로 짓게 될 자신의 가정은 울타리를 높고 튼튼하게 세우고 싶다. 안정적인 환경에서 아이가 사랑받고 자라 밝고 구김살 없이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첫 개인전이 열린 갤러리의 한가운데 벽에는 세 폭을 이은 아주 커다란 그림이 걸려 있었다. 새하얀 바탕에 빛나는 붉은 노을이 바람과 함께 스며든 나무가, 아래로는 노란색을 머금은 채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제 모습을 드리우고 있었다. 나중에 그러니까 인터뷰를 하다 그 작품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그렸다고 듣게 되었다.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딱히 그림에 대한 느낌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소리는 없고 노을은 지나치게 눈부시고 바람은 눈에 보이지만 피부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립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고 고통스럽지도 않다.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니다. 그저 고요히 인내심을 가지고 쌓아 올린 한순간의 진공 상태 같다. 그러나 그 찰나는 여기 박제되어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곳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하더라도 영원히 그 자리에 멈춰 빛나리라.

이런 그림이 취향이냐고 묻는다면 그렇진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저런 불타는 주황색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제주의 저녁 하늘은 파랗고 빨갛고 보랏빛이고 그렇게 파스텔 톤 색들이 겹겹이 덧칠해진 검은 안식이고 자그마한 위로였다. 그럼에도 그의 그림은 거부감을 들게 하는 대신에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는, 그리고 그를 이렇게 올바르게 키워 낸 어머니는 너무 강하고 완벽해 보였다. 고난을 딛고 성공한 많은 이들이 그러하듯 그는 항상 솔직했지만 어떤 이야기는 끌어내기가 어려웠다. 인터뷰 내내 나는 아마도 어떤 순간, 어떤 감정, 어떤 기억으로 그를 정의하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러나 이야기는 항상 도돌이표처럼 시작점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경력과 작품처럼 훨씬 더 복잡한 존재였다.

한편으로 나는 그를 보며 거울처럼 그러니까 내가 살았을지도 모르는 생에 대해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될 수 있었던 삶, 내가 선택하지 않은 어떤 삶들을.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압사당할 뻔했던 끔찍한 경험과 그 고통을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온 세월을 나이테처럼 겹겹이 두르고 그저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을 뿐이다. 휘고 구부러진 나무를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해 본 적은 없지만, 그 나무들은 늘 곁에 있었고 여전히 내 세계의 일부이다.

 

역경은 인간을 단단하게 만들어 준다. 그러나 우리는 섬세하고 연약한 존재이고 견디기 어려운 고난은 우리를 피폐하게 만든다. 나는 고전주의 소설처럼 숙명의 비극을 과장할 생각도 없고, 최근의 유행처럼 우연히 우리를 덮친 불행들을 받아들이고 이겨 내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말할 생각도 없다.

 

바람 많고 여자 많고 돌이 많던 이 섬은 여전히 바람 많고 돌이 많다. 도둑 없고 거지 없고 대문 없던 이 섬은 이제 도둑도 있고 거지도 있고 대문도 있다. 척박한 땅에서 험한 바다를 헤치며 살아가야 했던 옛날에 비해 현재의 삶은 모자랄 것이 풍족하고 윤택하다.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 불안해한다. 우리는 여전히 풍랑에 휩쓸린 작은 배처럼 이리저리 흔들리며, 모나고 부서진 몸을 서로 부대끼며 살아간다. 어디로 이를지 모른 채.

 

고속철도가 달리고 비행기가 날아가고 인공위성으로 스물네 시간 지구의 누구와도 이어질 수 있는 이 시대에도 우리는 외롭고 쓸쓸하고 슬프고 고통스럽다. 하지만 억센 파도와 바람에 지지 않고 강인하게 뿌리 내린 제주의 산이 그러하듯, 제주의 나무가 그러하듯, 제주의 돌이 그러하듯, 제주의 사람이 그러하듯 우리는 인생의 풍파에 맞서 끈질기게 살아간다.

 

침묵하는 돌, 응시하는 부엉이, 바람을 휘감은 나무에서 우리는 굳건한 의지를, 산의 인내와 바다의 숨결을 느낀다. 단단하고 올곧게 바라보며 결코 쓰러지지 않으리라. 그가 그리는 그림들. 그가 보는 제주. 그 자신이 바로 제주의 본모습이다. 아마도 내가 그의 그림에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거친 환경 속에서 있는 힘껏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는 바로 우리 자신이기 때문일 게다.

 

 

 

02 조기섭의 기억이 새겨진 장소들

 

 

ㄱ. 정겹고 넉넉한 ‘세화해수욕장’

 

때가 되면 백사장이 바다 중간에 배시시 생기는 세화 바다는 여름이면 나의 놀이터였고, 겨울이면 갈매기의 놀이터였다. 제주의 바다는 어딜 가나 깨끗하지만 세화의 물이 피부에 닿는 느낌은 정말로 경쾌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려주지 않고 나만의 비밀로 하고 싶을 정도이다.

 

어릴 적 이 바다는 모자란 것 없이 넉넉한 곳이었다. 놀 거리가 별로 없던 고향에서 동네 형 동생들과 땀을 뻘뻘 흘리며 축구하다 지치면 오 분 거리의 바다로 달려가 수영이 아니라 헤엄을 치곤 했다. 그러다 복(바닷물의 제주어)을 잔뜩 먹어 배가 고프면, 대나무에 낚싯줄을 매달아 방파제 돌 틈에 넣었다. 물에 퐁당 하기 무섭게 우럭, 어랭이, 모살치 같은 물고기들이 잡혀 올라 왔고, 비늘을 벗겨낸 회들을 뼈째 바닷물에 씻어 그대로 집에서 가져온 초장에 찍어 먹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물이 빠지고 바다 사이로 백사장이 반짝반짝거린다. 또 다른 놀이터가 생긴 것이다. 거기로 달려가 발을 좌우로 흔들며 모래 사이로 발을 비집어 넣으면 딱딱한 무언가가 발의 레이더에 포착되었다. 바로 대합이었다. 번개탄 위에 대합을 구워먹으며 수다를 떨던 세화 바다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름다운 해수욕장이지만 도내 다른 곳보다 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 모르는 행복한 풍경을 가진 나만의 바당(바다의 제주어)이다.

 

해수욕장 옆으로 부둣가가 자리하고 있는데, 공판장에서는 매일같이 흥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여름밤에는 한치오등어가 눈앞에 아른거렸고 그럴 때면 아버지가 언제 나가나 하고 목을 쭉 빼고 기다렸다. “기섭아, 가 보자”라는 아버지의 말에 부리나케 시동을 켠 오토바이에 올라타면 어느새 항구에 방금 정박한 아버지 친구의 배 위에 있었다. 집어등이 흔들리는 밤배에서 바닷물에 회 쳐 먹는 한치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닷새에 한 번은 읍내인 세화 마을이 시장통의 흥정 소리로 북적거린다. 바다에서 갓 잡은 물고기, 밭에서 막 뽑아온 싱싱한 야채를 시장길 한 켠에서 허리가 굽은 할머니들이 담소를 나누며 팔았다. 확성기를 허리춤에 지고 인생사로 시작해 효능이 있는지 의문스러운 약으로 끝내는 약장수 아저씨의 화려한 입담도 정겨웠다. 지금도 이런 옛 광경이 남아 있는 오일장이 열려 촌의 인심을 보여 준다. 세화해수욕장과 부두, 오일장 사이로 해안도로가 지나가는데 여행하다 장이 서는 날이라면 꼭 차에서 내려 시원한 바다 풍경과 제주 촌사람들의 맑은 바람을 느낄 기회를 잡기 바란다.

 

 

 

ㄴ. 이어도를 훔쳐본 작가의 혼이 남은 ‘김영갑갤러리’

 

어떤 사진은 인간사가 그려져 있고 어떤 사진은 소소한 일상이 들어 있으며 어떤 사진은 시공간의 순간이 담겨 있다. 부여에서 태어나 홀로 이곳 ‘이어도’에 내려와, 오름과 들판의 즐겁고 서러운 축제의 현장을 담아 낸 이가 바로 사진작가 김영갑이다. 루게릭병으로 셔터를 누르지 못하던 그날까지 그는 눈을 감고도 느껴지는 제주를 빛으로 표현했다.

 

그와의 인연은 제주 시내에서 40여 분 목장과 오름을 바라보며 드라이브하다 보면 닿는 번영로 끝자락에 있는 일출랜드에서 도자 강사를 하던 시절부터 시작된다. 일출랜드 아트센터의 원장을 맡고 있는 중학교 은사님이 하루는 보여 주고 싶은 곳이 있다며 나를 데려갔다. 아트센터에서 나와 오 분여 삼달리 사잇길로 달리다 나지막한 돌담이 있는 삼달 초등학교로 차가 들어갔다.

 

제주도 사람이지만 오히려 제주도를 더 몰랐던 터라 여백이 많은 이런 공간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몰랐다. 잿빛 잔돌이 깔려 있는 작은 운동장 한 켠에 하얀 건물만이 서 있었는데, 그 주변으로 모래사장에 올록볼록 모래집을 짓듯 그가 작은 돌담을 하나둘 손수 쌓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날 갤러리 문을 힘겹게 걸어 나오는 김영갑 씨와 인사를 나눴다. 화창한 정오의 햇살 아래 그의 주변에만 바람이 일었다. 그 바람에 불려가 버릴 듯 마른 몸을 간신히 버티고 서 있었지만 얼굴에 엷은 미소를 띠우고 우리를 맞이했다. 한동안 갤러리에 나오지 못하다가 마침 날씨가 좋아 잠깐 나왔다고 했다. 그의 책상에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사인을 한 책을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는 며칠 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이 만남이 굉장한 행운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 소소한 기억이, 그 소박한 갤러리에서 느꼈던 바람이 내 기억 속 제주와 다른 제주를 느끼고 싶을 때면 나를 이곳으로 이끈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여러 가지 이미지가 하나의 심상이 되어 기억에 각인되어야만 비로소 작업에 들어간다. 그러려면 대상과 오랫동안 교감을 나눠야 하는데, 그의 사진에도 그런 순간이 담겨 있다. 그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유독 그가 좋아했던 장소가 몇 군데 눈에 띤다.

그는 많은 시간 그 자리에서 아침 이슬을 맞고 한낮의 뙤약볕에 그을리고 지는 해가 그려 내는 분홍빛 하늘을 바라보며 순간이 멈춰진 진공 상태의 자연을 느꼈을 것이다. 그때 그의 피부로 느껴지는 바람과 시간의 흐름 그리고 공간이 나에게도 전해진다. 이것이 내가 그의 사진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그의 책에서 말하는 “찰나의 순간”을 사진에 담기 위해 먹이를 기다리는 맹수마냥 기다림을 즐기던 시간이 사진에 들어 있다.

 

그가 떠난 이곳을 이제 제자인 박훈일 작가가 지키고 있다. 돌담을 쌓기 시작했던 그 시절에는 차를 건물 앞에 세워 놓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그 조그만 운동장을 미로처럼 채운 아담한 돌담길을 따라 입구까지 걸으며 잠깐이나마 사색할 수 있다. 여기에서 많은 이들이 그의 사진을 통해 진짜 제주도를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ㄷ. 눈과 마음의 쉼터 ‘제주도립미술관’

 

생각을 하기 위해 걷다보면 생각은 없어지고, 숨소리와 발걸음 소리에 결론이 나지 않은 고민도 바람소리에 잊혀진다. 다른 도시에 비해 그리 크지 않은 제주시는 천천히 걸어서도 하루에 곳곳을 다닐 수 있다. 일찍이 내가 하고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접하지 못한 도내에서 창작소를 오픈하고 1년 가량은 찾아오는 학생이 없어 생각을 적은 전단지를 들고 마을 곳곳을 걸어 다녔다. 학생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었던 터라 아침, 저녁 이슬을 맞으며 걷기는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 마냥 기다리는 것 보다 몸과 마음에 활기를 불어 넣기에 즐거운 시간이었다. 나는 모든 것이 정해지지 않았던 그 길마다 아버지 생각을 하면서 걸었다.

 

내리는 눈물에 아버지를 보내던 날 아버지는 가시는 길 우리 네 식구면 됐다 하셨고, 마지막으로 아들이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살기를 당부하셨다. 이 한마디를 마음으로 이해하는데 그렇게 많은 방황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제주도에 내려와 1년을 넘게 고민을 하며 정리한 교육안을 들고 미술관으로 가던 그날도 아침 일찍 창작소를 나와 걷기 시작했다. 머리를 단정히 하고 체크무늬 남방에 얇은 트렌치 코트를 입고 걸었던 그날 그 길은 혼자 뚜벅 뚜벅 걸으면서 했던 수많은 생각들을 정리하느라 발걸음 마다 기억이 생생하다. 그날 미술관은 내가 넘지 못할 높은 산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그 길을 걷기 시작한 작지만 확실한 이유가 내겐 있었다.

 

걷고 걸어서 도착한 아름다운 미술관이 거기 있었다. 미술관에 가기가 쉽지 않은 저소득 계층 아이들에게 문화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고 싶어 시작한 작은 용기로 이곳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때 나는 스물아홉이었다. 내가 찾아간다고 반겨줄 사람도 없었기에 약속도 없이 무작정 찾아갔다. 관장님을 뵙고 싶다는 요청에 마침 출타 중이라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다음에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반나절을 기다려 초대 관장이었던 김남근 관장님을 만날 수 있었다.

 

사무실 들어갈 필요도 없이 바로 가지고 온 안을 보자고 하셨고, 그렇게 안내데스크 앞 의자에서 시작된 브리핑을 들은 관장님은 좋은 생각이라며 해 보자고 악수를 청했다. 제주도립미술관의 ‘어린이미술학교’ 교육프로그램은 그날 첫 발자국을 딛었고 지금까지도 매주 그곳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있다. 새로운 도전에 기꺼이 박수를 쳐 주는 그런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거기에 모여 제주만의 아름다운 전시 문화를 만들어 가고 있는 곳이 제주도립미술관이다.

 

제주시를 감싸고 있는 오름 중턱쯤 어딘가에 살며시 나지막하게 자리 잡은 느낌을 주는 이곳은 수업 끝나고 미술관 문을 나와 물길 사이로 나 있는 현무암 판석 위를 걷고 있으면 오후 노을을 아름답게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이다.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 지어진 이곳은 멋진 반영反影으로 많은 사진가와 관람객이 찾는 제주의 대표적인 문화 공간으로 고향에 돌아와 아이들을 처음 가르쳤던 이듬해인 2009년에 문을 열었다. 시내에서 가까워 찾아가는 데에 부담이 덜하다. 산중턱에 펼쳐진 드넓은 잔디밭에 앉아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소소하게 눈에 들어오는 작품들로 채워진 이 아름다운 미술관은 그 자체로 마치 작은 제주도인 듯싶다.

미술관으로 들어서면 정면의 유리 너머로 중앙정원이 보인다. 건물 중앙에 하늘이 들어서 있는 이 넓은 공간에는 시시각각 달라지는 빛이 다양한 각도와 색채로 비쳐 들어온다. 가끔 미술관 소파에 앉아 중앙정원의 푸른 잔디가 무채색의 건물에 입혀주는 길을 따라 전시장 문을 바라보고 있으면 3년전 여름같았던 개관식날 북적거리던 축제 분위기가 아롱거린다. 그 시간이 흘러 이젠 가끔 수업이 끝나고 정돈된 관람객을 따라 4개의 전시장에 걸려 있는 국․내외 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며 도내에도 이런 미술관이 있어 행복하다고 느낀다.

매해 굵직한 전시가 일 년에 여러 회 열리기 때문에 몇 번을 찾아가도 새롭고, 자연과 미술 안에서 제주를 느끼고 싶다면 첫 번째로 찾아야 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ㄹ. 제주의 밤하늘을 노래하라! ‘제주 별빛누리공원’

 

그 친구는 적어도 내가 보기엔 어른처럼 보였다. 촌에 있는 몇 개의 초등학교는 중학생이 되면 세화중학교로 모인다. 그 중학교에서 만난 키도 제일 크고 목소리도 굵었던 상현이는 각 초등학교의 짱들도 건들지 못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유순한 성격을 가졌던 상현이는 중학교 졸업식장에서 유일하게 나와 같이 사진을 찍었던 친구였고, 연락도 없이 제주도에 내려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나 새로 시작한 이곳에서의 유일한 벗이 되어 친구로 지낸다. 일기일회. 인연은 그런건가보다.

 

별이 빛나던 어느날 밤 아는 형에게 2만원을 주고 중고로 산 자전거를 타고 창작소에서 신제주 끝자락에 사는 상현이 집까지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난 자주 즉흥적으로 움직인다. 도착한 상현이네집 옥탑방에서 우린 각자 자전거를 타고 제주대학교까지 누가 먼저 올라가나 내기를 했다. 내기에 걸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우린 눈에 불을 켜고 달리기 시작했다. 기어도 없는 자전거로 쉼 없이 오르막길인 이 길을 우리 둘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페달을 밟았다. 체력에 자신했던 나도 순간순간 오는 현기증과 거친 숨소리에 중간 중간 쉬고 싶었지만 지기 싫어 뒤를 힐끔 힐끔 쳐다봤다. 하지만 한켠으로는 제발 멀어지지 말라고 생각하며 올라갔다.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은 내기에 우리는 그렇게 땀을 흘렸다. 다 오르고 나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하늘이 보였다. 그렇게 까맣고 반짝이는 하늘을 난 이전에 본적이 없다. 중산간 제주대학교 옆에 그 아름다웠던 별의 설레임을 담을 수 있는 곳이 있다. 가끔 늦은 저녁에 높고 낮은 별빛들을 헤아리며 땀 흘리고 봤던 맑은 밤하늘이 생각나면 찾는 곳이 제주별빛누리공원이다.

 

모든 풍경이 그러하듯 달빛을 등진 구름 사이로 빛나는 별은 때론 낭만적이고 때론 차갑다. 별빛 누리(세상을 예스럽게 이르는 말)를 산책하기 위한 기대로 그 위에 올라가서 뒤를 바라보면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린다. 땅위에 세운 빛의 이야기가 가득한 탁 트인 제주의 들녘이 한 순간 오색 빛을 발하는 밤의 풍경으로 눈에 담겨 산란 거리기 때문이다. 이런 풍경을 곁에 두고 많은 가족과 연인들이 한가로이 산책하며 밤의 낭만을 노래하는 모습 또한 행복함이 묻어난다. 귀뚜라미 울음소리 사이로 들리는 담소 소리 그것만으로도 설레는 마음에 잔잔한 밀물을 만들어 내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면 그 길을 따라 제주별빛누리에서 또 다른 세상 빛의 이야기를 관람할 수 있다.

 

내부를 들어서면 아이들의 작품들이 가득하다. 작년 우주와 별빛누리공원을 주제로 창작소에서 아이들과 같이 몇 달간 진행한 프로젝트 수업의 결과물들이 상설 전시로 건물 곳곳에 전시되어 있다. 작년 전시 시작과 더불어 시작된 이곳 실기실에서 진행되었던 교육프로그램 ‘빛으로 그리는 별자리’, 올해 진행 중인 ‘거대한 우주의 과학실험실’은 평일 밤 늦은 시간에 도 불구하고 입체에 밤하늘을 그리기 위해 오늘도 아이들이 찾아온다.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호기심의 대상인 우주, 그 우주를 탐하며 망원경 렌즈 속 수백만년의 시간을 거슬러 어둠속에서 홀로 빛나는 별들을 찾는 즐거움은 아이들을 꿈꾸게 하고 어른들에게는 그 꿈을 추억하게 한다. 우주에 대한 영상과 전시도 보고 산책도 하며 사람 사는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이곳은 그렇게 눈과 마음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 곳이다.

 

 

글 / 김미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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